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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6-22 07:11
저의6.25 회고
 글쓴이 : 산울림
조회 : 1,498  

저는6.25를 8살때 겪은 어린 시절을 회고해 봅니다
저는 1943년 1월 경남 산청군 금서면 지막리 신촌 659번지 4남1여의
막내로 태어나 삶이 극히 어려운 시절을 겪고 또한 6.25도 겪은
파란 만장한 시절을 걸어 온 사람중의 한 사람입니다 꽁보리밥도 먹지 못하여
밀기울떡 쑥털이 송구밥(소나무 내피를 버꼐 디딜 방아에 빠아서 밥을 지음) 등
먹고 살기가 어려웠던 시절을 살며 학교도 7 km 자갈밭 신작로를 도보로 12년이나 통학을 하였습니다

자동차가 없던 시절 우마차가 자갈 신작로를 덜컹대며 다니던 그 시절
그래도 저의 집은 대농가로 머슴을 데려 놓고 살았던 가정이라 저는 쌀밥도 자주 먹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은 마찬 가지였습니다 6.25 피난살이 학교 교정에 천막을 치며 미국 구호 물자를 지원 받아
가며 고향 마을을 뒤로 한 시절이였습니다

거창 함양 산청은 빨갱이 지대로 밤이면 적군
낮이면 아군으로 둔갑되는 그런 마을에 살면서 아군과 적군으로 부터 많은 죄악을 받으며 살아 왔습니다

6.25직후 거창 선량한 양민 학살 사건 이것이 대표적인 예로 생각 되어집니다 저의 아버님 께서도
마지못해(살기위한)
부역을 한 죄로 추달(꺼꾸로 달아매어 코에 고추 가루를 붇고 억지로 자백을 받는 고충)을 받곤 했습니다 적군이 도주로가 차단되어 지리산 잔당으로 남은 인원이 무려 2개사단 이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정순덕이가 사라진 지도 불과 25년도 못 되었답니다

밤이면 우리집 뒷 윤씨네들 제실 근처에서 교전이 잦았습니다
현재 저의 큰 형님은 84세로서 그 당시 지역 전투 경찰에 가입되어 저의 집은 적군으로부터 많은 탄압을 받았습니다. 한창 토벌 작전이 왕성하던 때 빨강이들이 집에와서 아버님 가슴에 다발총을 들이 대며 공포를 쏘는 현장의 모습을 연상하니 지금 이 시대를 바라보는 저의 시각은 남 다릅니다

저는 6.25당시 8살 나이로 지금도 그때의 상황들이 생생히 기억 됩니다
아군은 작전을 세우며 낮에는 쉬고 주로 야간에 전투가 전개 되었습니다
하루는 낮에 지역 전투 경찰이 저의집 뒤 윤씨네 제실 및 서당에서 전투 준비에
만전을 기했으며 야간을 기다리는 중 채 어둠살이 들기도 전에 아군과 적군의
전투가 시작 되었습니다

아버님과 식구들은 총성에 겁을 먹고 모두다 방에 엎드려서 숨을 죽이며 초조하여 불안에 떨고 있을때 우리집 뒷간에 탄피 떨어지는 소리가 쨍그랑 쟁그랑 아직도 귓전에 생생합니다 총알이 벽을 관통하며 구멍이 군데 군데 났습니다이러기를 20여분 지나자 지역 전투경찰에 입대한 큰 형님 께서 은신처가 없어서 갑자기 방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아버님 께서 큰애야 어서 숨어랴 큰일 나겠다며 아랫층 들검에(지역 사투리)빨리 숨어라 형님은 M-1 소총을 소지한채 아랫층 들검으로 은신 하셨습니다.그러기를 10분후 호롱 등불을 든 빨강이가 들검을 향하여 수색을 하는 겁니다 등불을 든 적군은 상대방을 잘 볼 수 없어도 큰 형님은 상대방이 잘 보이니 형님은 위험을 감지 총을 겨누고 있는데 점점 닥아 오는 겁니다 이때 형님은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다행히 마침 불발하여 소리도 나지않아 적군은 다른 곳으로 가고 형님 께서는 은신처를 뒷집 부엌에서 솔깽이
나무잎 가지로 몸을 은폐하여 있던중(아군 여러명과 함께) 또 두 명이 부엌으로 들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아쇠를 여지없이 당겨 M-1 연발 소총 한 크립 8발을 발사하여 그자리에서 2명이 즉사 하였습니다 만약 우리 집에서 이 상황이 벌어 졌으면 저의 집은 잿더미로 변했고 가족도 몰살 되었을 것입니다(당시 한국군 모사단 207부대 격전지).....이어서 게속

지리산은 골골 마다 산이 깊고 잔당들의 은거지가 좋아서 잔당을 소탕 토벌하기란 매우 어려운 처지였습니다
섣불리 수색을 하다간 아군이 포위되어 적군에게 피해를 입게 십상이다 아군이 많이 피해를 본 지역은 대표적으로 지리산 피아골로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 유명한 여자 빨갱이 정순덕이가 앞잡이 노릇을 하였습니다

정순덕이가 빨갱이 앞잡이가 된 것은 확실이는 모르나 남편 피해의 보복으로 괴뢰군 집단에 입당 한 것으로 소문을 들었습니다 산청군 삼장면 사람으로 마지막 까지 남아서 활동하던 역사적으로도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이 잔당들은 군량미가 떨어지면 밤에 부락을 습격해 식량과 먹을것을 강탈해 간다 게다가 부락 청년들을 강제로 끌고가서 밤이 새도록 짐을 지게에 짊어지게 하고 지리산 응거지로 들어갑니다 이 청년들이 조금이라도 반항의 눈치가 보이면 과감하게 처단하곤 하였습니다

이들의 생활은 골짝이에 아지트를 만들어 놓고 강탈 해 간 식량을 자기들이 설치한 디딜방아로 찌어서 굴 속에서
은거하며 낮에는 편히 쉬다가 밤에 활동을 개시한다 살아 남기 위한 마지막 발버둥이였습니다
그당시는 싸리대로 만든 싸릿 대문에 미군들의 통조림 빈 깡통을 달아서 쨍그랑 소리가 나면 여지없이
습격한 것이다

빨갱이의 무기는 주로 단발 장총과 연발 다발 총이였습니다, 대신 우리 아군의 무기로는 M-1 8발 연발총 일제인 단발 구구식총 로켙트 포도 있었다 확실히는 모르지만 호주기 라는 비행기도 있었고요
이들은 서로 연락 방법은 봉화불로 이쪽 저쪽 산봉우리에 응거하고 있는곳을 표시하곤 하였습니다

전투경찰대 이신 형님은 주간 수색 작전을 지리산 어느 적의 목표 화력지점을 토벌 작전 계획으로
골작길을 향하였습니다 30 여명 정도의 수색대는 산 능선을 따라 감시하며 사주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때 어느 곳에서 예기치 못한 역공이 두려워서 초 긴장 상태로 작전에 임하였습니다

어느 골짜기를 내려다 보니 양지바른 잔듸밭에서 3~4명이 옷의 이를 잡고 있는것을 발견, 수색대는
도주 예상로를 잠복 한참을 기다리다가 조금 먼 거리에서 (다른 빨갱이의 역공이 두려워서..)사격을 가했습니다.
순간 정순덕 일행은 번개 같이 산 속으로 살아지고 말았습니다

★.빨치산 정순덕이에 대해서
당시 현주소→경남 산청군 삼장면 매월리(1933년생 여자)
남편:성석조(빨치산)
정순덕이는 남편을 따라 빨치산에 입당 ★.2004년에 당 70세로 생을 마감(21년전)
1955년을 기점으로 빨치산 세력은 약화 되었지만 10여년이 훨신 넘도록 정순덕 일행은
왕성한 활동을 하였습니다

정순덕은 지리산 지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잘 훈련된 빨갱이라
산을 타는데는 비호와 같고 마치 축지법을 구사하는 것 처럼 동해 번쩍 서해 번쩍 귀신 같은
여인으로 산청 일대에 널리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빨치산이란 용어는 아마 비정규전 유격대를 일컷는 말 인것 같습니다
다음이야기....형님 부대의 빨치산 소굴 새벽 공습 작전이 전개 됩니다

지리산 피아골 전투는 아군과 적군 모두가 많은 사상자를 낸 맹렬한 전투 지역입니다
형님의 말씀에 의하면 당시 전라도 경상도 일대에 한국군 8사단과 수도사단이
주둔 해 있었다고 하며 당시 백선엽 소장이 전 작권을 명령 하달 하였다고 합니다

각 지방마다 특공대인 지방 청년들을 주축으로 한 전투경찰대도 한 몫을 했습니다
빨치산 부대로는 경남 도당과 2개부대가 대치 중이였다고 합니다 도주로가 차단되어
최악의 발악으로 저항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형님 소속 부대는 토벌 작전을 전개 하였습니다 저의 인근마을 수철리 에서 왕산(일명 욍디기산)을
넘어서 지리산으로 가는길이 있고 정순덕의 출생지인 산청군 삼장면을 넘어서 지리산을 향하는 당시 전투로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형님의 부대는 지리산 피아골 주변에 발치산 소굴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작전을 세웠습니다 삼장면을 지나고 중산리를 지나서 약40명 정도의 인원이 내일 새벽 습격을 위하여 밤 9시경 아지트로 이동, 새벽 1시에 도착하여 주변에 포위망을 쳣습니다 그러기를 4시간이 경과 되어서야 빨갱이 한 놈이 출입문 밖으로 나와서 비가 오겠다며 혼자 구드렁 거리고 굴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동이 트도록 움직이지 않아 후퇴하여 멀리 포위망을 치고 용감한 선발대 2명이 수류탄 안전 핀을 빼 들고
투척할 곳이 없어서 넓은 굴뚝 속으로 투척하고 재빨리 원위치로 돌아 왔습니다. 그때 문 밖으로 5~6명이
튀어 나오고 또 연달아 튀어 나오며 삼삼오로 짝을지어 총을 겨누며 응거하기 시작 하였습니다

그 소굴 안에는 얼마나 많은 인원이 진을 치고 있는지는 예상치 못하는 실정이고 적군의 꾀임 전술에
되려 당할 수 있다는 소대장의 지시에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그 상항을 본부에 돌아와서 보고후 상황이 종료 되었지요

제가 6.25직후 겪었던 이야기도 무궁무진 합니다
마을 서당에 어린이 들이 합동으로 끌려가서 억지로 인민군 노래도 배웠지요 그 노래도 지금 생생히 기억을 합니다, 무고한 농민도 제명에 다 못살고 비운의 명을 마감하는 6.25가 낳은 비극의 현상입니다

저는 빨갱이 들이 밤에 들이 닥치면 마루에 나가 일부러 아버지 어머니 어디 가셨냐고 울기도 하였고요(부모님은 야간에 도피하심) 처참한 한 시대를 보내야 했습니다

전투경찰대는 우리 부락을 위시한 인근 부락의 청년들로 잘 조직 되어 있었습니다
그당시 빨치산이 된 사람들도 자수하여 경남도당에 입당 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 사람들의 친척들도 진격한 우리군의 수사에 미리 겁을 먹어 산으로 입산 후 빨치산이 된 사람도 많았다고
형님은 회고 하십니다

이 입당한 이들을 앞잡이로 삼아 지리적 조건을 잘 이용하여 전술이 뛰어나 소탕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빨치산 잔당도 사상자도 많이 발생 되었지만 자수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자수한 강삼수 빨치산이 조직과 응거지 이동경로 등 협조를 많이 하여 살아 남을 수 있게 되어서 주재소에 근무를 하기도 하였답니다. (다음 이야기)

조개골에 발치산이 응거하며 아지트를 마련 하였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어느날 야간 작전을 전개 하였습니다
전투경찰대는 밤9시 적의 아지터 인근에 포위망을 치고 짐복 근무를 하던 중 밤12시가 지나니 2명의 보초병이 이제는 안심해도 되겠다며 잠적 후 아군은 M-1 소총 ,수류탄 박격포 등을 사격하여 격렬한 전투가 시작되어 4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습니다

조개골에는 포성과 비명으로 살벌한 새벽을 맞았습니다 이 전투로 형님은 회고 하시기를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전투경찰대(특수부대,국민방위대,별정부대 등 명칭이 많음 주력 작전은 경찰간부가 지휘함)
사망자로는 고천수, 손상기,유종갑,김종근 등이 였었으며 빨치산도 많은 사망자가 발생 하였습니다

그당시 지역민이 빨치산 잔당이 된 사람으로는 지금 기억으 오부면 안안도, 생초면 정우영, 삼장면 이룡, 등이
있었다고 회고 하십니다.

현재 형님 께서는 참전 용사로 혁혁한 공이 지대하고 그 공적을 기리기 위해 국가 유공자로서
훈 포장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저의 빨치산 이야기는 막을 내립니다........

다음 기회가
있으면 삼장면 대원사 계곡의 1개 군부대가 적군에 포위되어 많은 사상자를 낸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지금까지 두서없는글 잘 읽어 주시고 느꼐 주신 진사님께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다음이야기)
★전투경찰대 이신 형님은 주간 수색 작전을 지리산 어느 적의 목표 화력지점을 토벌작전 계획으로
골작길을 향하였습니다

20 여명 정도의 수색대는 산 능선을 따라 감시하며 사주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때 어느 곳에서 예기치 못한 역공이 두려워서 초 긴장 상태로 작전에 임하였습니다
어느 골작이를 내려다 보니 양지바른 잔듸 밭에서 3~4명이 옷의 이를 잡고 있는것을 발견, 수색대는
도주 예상로를 잠복 한참을 기다리다가 조금 먼 거리에서 (다른 빨갱이의 역공이 두려워서..)사격을 가했습니다
순간 정순덕 일행은 번개 같이 산 속으로 살아지고 말았습니다.
★.지리산 피아골 전투는 아군과 적군 모두가 많은 사상자를 낸 맹렬한 전투 지역입니다

형님의 말씀에 의하면 당시 전라도 경상도 일대에 한국군 8사단과 수도사단이
주둔 해 있었다고 하며 당시 백선엽 소장이 전 작권을 명령 하달 하였다고 합니다

각 지방마다 특공대인 지방 청년들을 주축으로 조직한 전투경찰대도 한 몫을 했습니다
빨치산 부대로는 경남 도당과 2개부대가 대치 중이였다고 합니다 도주로가 차단되어
최악의 발악으로 저항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 빨갱이 들이 밤에 들이 닥치면 마루에 나가 일부러
아버지 어머니 어디 가셨냐고 울기도 하였고요(부모님은 야간에 도피하심) 시간이 된다면 종종 들려 드리지요.
★.다음은 구정때 고향가서 둘째 형님께 발치산 토벌 작전 이야기를 담아 왔습니다
저도 기억을 하고있는 사항이지만 둘째 형님이 더 생생히 기억을 했었습니다

☞.아버님은 지금 살아 계시면 114세 이십니다 빨치산 총 지휘관은 이현상
부 사령관에는 이영회가 맡고 있었다.이영회가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산청군 삼장면
조개골에 거점을 확보하고 이른바 남부군으로 불리는 "남반부인민유격대"가 조직 되었다.
그후 빨치산과 저의 큰형님이 소속된 전투경찰대 간의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 되었다.

1952년2월 이였던가 숲이 아직 안 우거진 겨울 작전에 의하여 상호 많은 희생자를 내고
빨치산 세력은 약화 되었다.그래도 잔당들이 민간인 교란과 경제적 마비를 위하여
강탈을 계속하였다.우리 민간인 중에도 빨치산에 포섭 되어 활동한 게릴라 같은 간첩도 있었다

어느날 큰형님이 전투경찰대에 소속하여 있다는 정보가 빨치산 부대에 제공되어 빨갱이가 우리집에
찾아와서 개놈의 새끼 어디 갔느냐고 아버님께 자백 하라고 다고쳤다.아버님은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논에 거름지고 갔다고 응변 하였다.그럼 몇시에 오느냐고 거짓말 하면 가족 몰살 하겠다 라고 하며
그때 오겠다고 하였다

아버님은 대여섯 시나 되어야 농사일을 다보고 집에 올 것이다 라고 거짓말을 하였다.그후
형님은 민간인 옷 차림으로 집에서 대기 하였다.아니나 다를가 그 시간에 맞혀서 빨갱이 일행이
우리집에 도착해서 형님이 정말 농군이냐며 다고쳤다.

그러자 형님은 거짓이 아니며 다시 확인하여 달라고 하니 그럼 손을 펴 보라고 하여다 손을 펴 보이자 자세히 들여다 보고 살피더니 형님의 험한 손을 보며 농군은 맞는가 보다 전투경찰에 입당하면 개놈들 식구 다 몰살 시킬 것이다 라며 돌아 갔다.현재 둘째 형님은 작년에 돌아가셨지만 37년생으로 80세다 둘째 형님이 2011년 설때 회고한 내용을 올려 봅니다.

두서없는 글 끝까지 읽어 주시고 느꼐주신 진사님께 감사 드리며 항상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2017년 6월 25일
6.25 67돐을 맞이하여 임 삼 수 드림